책소개
안도 쇼에키는 에도시대 중기인 18세기, 농민 사상을 대표했던 유물주의 철학자다. 변증법 사상과 사회관의 반봉건적 성격 때문에 그는 사후 저작물과 함께 묻혀 버렸고, ‘잊힌 사상가’가 되었다. 교토대학의 가노 고키치 박사가 헌책방에서 ≪자연진영도≫라는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발견하게 되면서 안도 쇼에키와 그의 사상은 약 100년 만에 부활하게 된다. 가노 교수는 ≪자연진영도≫의 독창적이며 비판적인 사상에 “쇼에키는 일본이 낳은 최대의 사상가로 세계 사상사에 빛날 인물”이라고 감탄했다.
쇼에키는 인류의 역사가 태고의 자연세로부터 성인이 출현한 이래의 법세를 거쳐 이상사회인 자연세로 되돌아간다고 봤다. ‘자연세-법세-자연세’라는 쇼에키의 역사관은 근대적인 진보 사관이나 변증법적인 발전 사관이 아니라 동양 고대의 순환 사관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도원향(桃園鄕)으로서의 이상사회를 꿈꾸기만 한 유토피언은 아니었다. 최고 강령으로서의 ‘자연세’에 도달하기 위한 과도적 사회를 모색하고 있는데, 이런 과도적 사회는 ‘읍정(邑政)’ 자치를 기초로 하는, ‘직경자’가 결정권을 가진 사회다. ‘법세’의 계급과 신분 등을 형식적으로 유지하면서도 모든 인간이 직경하게 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이별(二別)’의 문제를 해소해 가게 되는 것이다. 쇼에키에 따르면 과도적 사회에 ‘직경’과 ‘호성’을 체현한 참으로 바른 사람, 곧 ‘정인(正人)’이 나타날 때 ‘자연세’로 이행한다.
<법세 이야기>는 동물이 집회를 가지고 인간의 ‘법세’를 비판한다는 줄거리다. 이것은 이솝보다는 오히려 스위프트(swift)에 가까운 픽션으로 ≪자연진영도≫ 가운데서 극히 특이한 양식을 이루고 있다.
새·짐승·벌레·물고기, 즉 네 종류의 세상은 약육강식의 세계이지만, 동물의 그와 같은 생존 방식은, 이른바 ‘통(通)·횡(橫)·역(逆)’이라는 ‘활진(活眞)’의 운행 논리에 근거하는 한 극히 자연적인 것이다. 한편, 통기의 존재인 인간의 자연은 횡기의 존재인 동물의 자연과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세’에서 멀리 떨어져 버린 인간의 법 세계가, 동물의 세계와 얼마나 비슷한가를 극명하게 묘사해 내고 있다. 본래 동물과 달라야 할 인간이 동물화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 반자연화하는 것이라는 하나의 역설을 제기한다. 다음으로, 통기의 존재인 인간이 횡기의 삶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법세’를 보여 주면서 자연에 즉해서 살아가는 동물이 자연에 반해서 살아가는 법세의 인간보다도 훨씬 행복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200자평
<법세 이야기>는 안도 쇼에키의 사상을 동물담이라는 형식에 담아내고 있다. ≪자연진영도≫ 가운데서도 극히 특이한 양식으로 새, 짐승, 벌레, 물고기들이 회합해 인간세계를 비평하는 내용이다. 우화적인 표현과 풍부한 고사, 속담을 이용해 사람이 짐승보다 우월하다는 종래의 주장을 뒤집고 짐승들의 세계가 오히려 인간세계보다 진실하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친다.
지은이
1703년에 지금의 일본 아키타(秋田) 현 오다테(大館) 시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기와 청년기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자신이 과거에 선종(禪宗)의 노승으로부터 대오(大悟)를 인정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어, 이를 받아들인다면 청년 쇼에키는 깨달음의 경지를 체험한 선승(禪僧)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승려의 신분을 버리고 의사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당시 의학의 중심지였던 교토에서 의학을 배우는 한편 여러 분야의 학문을 연마해 백과사전적 지식인으로 변모했다.
1744년부터는 지금의 아오모리(靑森) 현 하치노헤(八戶) 시에 살면서 지방의 문화 서클에서 사상 강연을 하는가 하면 관청으로부터 어려운 치료를 의뢰받을 정도로 유능한 의사로서의 명성도 얻었다. 쇼에키가 하치노헤에 정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농산물의 지나친 상품작물화로 생태계가 파괴되고 이로 인해 이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 기갈로 인해 환자와 아사자가 속출하는 등 비극적인 사태에 직면한 그는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병이 발생한 원인에 눈을 돌렸다. 곧 자연 파괴는 눈앞의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경제적 시스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때부터 비판적 지성인으로 행동하게 되고 하치노헤는 쇼에키 사상의 탄생지가 된다. 그는 일본 근세 철학사에서 보기 드문 독창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을 남기고 농민 운동가로서 농민들로부터 ‘수농대신(守農大神)’이라 숭앙을 받으며 1762년에 세상을 떠났다.
쇼에키는 대표 저서인 ≪자연진영도≫에서 도쿠가와막부의 봉건제도에 대해 비판하며 무사 계급을 폐지하고 중앙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농업 평등 사회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그는 19세기에 일어난 왕정복고 운동의 선구자이며, 동서양 학문에 박학다식하고 유럽 사상을 연구한 최초의 일본인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중심 사상으로는 기일원론(氣一元論), 사회변혁론(社會變革論), 존왕론(尊王論) 등을 들 수 있다.
쇼에키의 저서로서는 원고본과 간행본으로 된 ≪자연진영도≫와 ≪통도진전(統道眞傳)≫ 등이 있다.
옮긴이
박문현
경북 자인에서 태어나 경북고를 졸업하고 부산대, 영남대, 동국대에서 철학 및 동양철학을 전공했다. 198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동의대학교 철학과에 재직하면서 인문과학 연구소장 및 중앙도서관장을 역임했다. 도쿄대 방문 교수 및 옌볜 과기대 객원교수를 거치고 새한철학회 회장을 지냈다. <묵자의 경세사상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 묵자 사상 관련 논문 20여 편을 국내외에 발표했다. ≪묵자≫, ≪법세 이야기≫, ≪기(氣) 사상 비교연구≫를 번역했고, ≪철학≫, ≪세계고전 오디세이 2≫, ≪동양 환경사상의 현대적 의의≫(일본), ≪묵자 연구≫(중국) 등의 공저가 있다.
강용자
일본 고쿠가쿠인대학(國學院大學)에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엽집(萬葉集)≫을 텍스트로 해 한일 간 고대 문화의 관계를 전공했으며 부산대학교, 동아대학교, 부경대학교, 경남대학교, 부산외국어대학교, 해양대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동서대학교, 동의대학교를 거쳐 현재 창원대학교에 출강한다.
번역서로 ≪일본 풍토기≫(동아대학교 출판부, 1999), ≪여제(女帝)의 사랑-시인(詩人)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柿本人麻呂)≫(제이플러스, 2003), ≪인터넷 시대의 종교≫(도서출판 역락, 2005), ≪양생훈≫(지식을만드는지식, 2008), ≪풍토기≫(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일본의 종교≫(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법세 이야기≫(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만엽집≫(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萬葉 祈禱文化考>, <≪萬葉集≫에서 보는 他界觀>, <萬葉 ‘夢’考>, <萬葉 神觀考>, <萬葉 天皇考> 등이 있다.
차례
1. 새들이 회합에서 법세에 대해 논의하다
2. 짐승들이 회합에서 법세에 대해 논의하다
3. 벌레들이 회합에서 법세에 대해 비평하다
4. 물고기들이 회합에서 법세에 대해 비평하다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짐승 세계의 서열에서 독(獨)은 제왕, 코끼리는 공경, 사자는 장군, 호랑이는 제후, 원숭이는 가로, 용인, 곰은 관리, 이리는 사무라이, 말은 졸병이다. 사슴, 멧돼지, 돼지, 여우, 살쾡이, 오소리, 원숭이, 토끼, 개, 고양이, 쥐, 족제비 등 모든 작은 짐승은 관리, 상인, 승려, 신관, 슈겐자, 의사, 거지 등이 된다. 짐승 세계에는 큰 모든 것이 작은 것을 먹을 때의 서열이 갖추어져 있다.
-48쪽
물고기 세계에서는 금은의 통용이 없어서 욕심으로 헤매는 수탈과 쟁란은 결코 없다. 그야말로 감사한 일이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인간의 법세는 금은이 통용되기 때문에 욕심에 미혹되어 수탈과 쟁란이 끊이지 않게 돼 버린 일이.
-143쪽